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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광장

첫 출근 새로운 다짐

  • 작성자백남희
  • 등록일2018.04.16
  • 조회수1,087



첫 출근 새로운 다짐

 

 

봄입니다. 노오란 개나리는 만개했고, 진달래와 목련도 활짝 피었습니다. 수줍은 듯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철쭉도 조만간 붉은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지난겨울은 정말 매서웠습니다. 누군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찬 기운을 막아내지 못한 탓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모스크바보다 서울이 더 춥다는 이해하기 힘든 일기예보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예전과 다르게 동파소식도 자주 들려왔습니다.

기나긴 엄동설한의 한복판을 견뎌온 탓일까요? 봄소식을 가득 담은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데요. 나만의 착각인가요? 아니면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절실함 때문일까요?

 

98.

아니 정확히 말하면 1차 복직자 65명에게도 어김없이 봄은 왔습니다. 다만 필연법칙에 종속된 자연과 달리 해고동지들은 복직이라는 봄을 맞으려 장장 15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416, 세월호가 침몰한지 4년이 되는 내일, 첫 출근합니다.

 

전날 저녁, 오랜만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저녁은 언제나 막내와 아내 그리고 내가 전부였는데 아마 아내의 압력이 통한 것 같습니다.

올해로 22살인 큰딸이 아빠, 축하해하더니 나를 힘껏 안아줬습니다. 여태껏 안아준 적은 있어도 딸에게 안겨보기는 처음입니다.

나는 큰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해고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리게만 봐왔는데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대견하게 커줬습니다.

 

둘째 아들 녀석은 문자로 대신했습니다. “아빠, 드디어 복직이네! 설마 이번에도 안 해줄까 조마조마 했는데 다행이다. 이제 아빠가 조금은 맘 편히 지낼 것 같아서 다행이야. 축하해

커가면서 어릴 때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온대간데 없고, 묻는 말에만 ”,“아니오짧게 답하던 녀석이었습니다. 아내가 많이 서운해 했는데, 유전자는 속이지 못한다고 어떠한 말보다 따스한 마음을 한가득 보여줬습니다. 나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남자라는 동물은 마음 전하기가 이토록 힘이든가 봅니다. 말보다 문자가 훨씬 나으니 말입니다.

 

초등4학년인 막내는 복직 의미를 잘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불규칙적이기는 해도 출근이란 걸 꼬박해왔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막내는 끝내지 못한 컴퓨터에 마음이 가있는 눈치입니다.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던진 한마디도 가관입니다. “아빠, 잘했어뭘 잘했다는 걸까요. 여전히 시큰둥합니다.

 

아내가 케이크를 꺼냈습니다. 하나하나의 촛불이 어둠을 밝혔습니다. 모두 15, 아내가 말하기 전까지 나는 촛불의 개수가 해고된 15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벌써 무뎌진 걸까요?

 

생일축하 노래는 복직축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복직축하 합니다.”

복직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아빠

복 직 축 하

합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놈의 섬세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근엄하고, 강해야 한다는 우리식 아빠의 이미지를 지키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럴 때는 어릴 때부터 써온 안경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20년을 넘게 살아온 아내의 예리한 눈은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누군가 해고는 해고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족도 동일한 해고의 아픔을 겪는다는 얘기지요. 그 긴 세월 묵묵히 견뎌왔을 아내와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다 잘 된 거야. 파업에다 구속, 할 거 다해봤으니 미련 없이 이참에 새 출발 해봐해고의 부담을 덜어주려 종종 말해왔던 아내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내 말처럼 철도를 떠나지는 못했지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복직선물도 받았습니다. 짙은 갈색에 검은색 줄무늬가 조화를 이룬 캐주얼한 구두입니다. 아이들도 얼마씩 돈을 보탰다고 아내가 귀띔합니다.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동료에게 뭐라 말을 건넬지 모르겠습니다. 맴돌기만 할 뿐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직하면 뭘 하겠다는 다짐도 못했습니다. 떠나온 세월이 길었던 만큼, 동료와 부대끼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깊이 와 닫는 지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철도 민영화를 막기 위해 열중했던 우리의 소중한 경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마 내일 첫 출근할 65명도 잠을 설치고 있을 겁니다. 지난 3일간의 교육을 통해 65명의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노조가 기획한 심리치유프로그램 중 가지고 갈 것남겨 둘 것을 적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해고동지들은 분노욱하는 성질등을 남겨두겠다고 했습니다. 가져갈 것은 동지’,‘철도노조등이었고요. 65명이 비슷한 생각을 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왜 해고동지의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자리 잡았을까요? ‘분노란 감정을 억누르면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억누른 감정은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달래고자 합니다. 하지만 술은 감정만 자극할 뿐입니다. 바로 우울증이 찾아오고 대인기피증으로 이어집니다. 강사 중 한 분은 장시간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면서 철도민영화를 막고 철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기보다는 노조의 삶을 살아온 15년의 세월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더 늦기전에 정말 자야겠습니다.

현관 앞 가지런히 놓인 구두가 마냥 정겹게 느껴지는 오늘은 416일입니다.

 

 

이제 추억이 되겠지요.

긴 세월, 지켜주신 조합원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겨진 33명의 해고동지들도 잊지 않겠습니다. 33명이 복직할 때까지 투쟁은 끝난 게 아닙니다.

 

2018.04.16. 백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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