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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광장

삐라의 추억 12

  • 작성자김명환
  • 등록일2019.01.18
  • 조회수805

적기



19361223,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주재소 순사가 공덕리 농가를 방문했다. 순사는 지난 가을 호구조사를 위해 신원조회를 의뢰했던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맥도리에서, 김대성 김소성 형제가 등재된 적이 없다는 회신이 왔다고 말했다. 김대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잔주름이 잡혔다가 펴졌다.

! 그럼, 김해 덕도리에 한 번 알아보시지요. 덕도리에 산 적이 있었으니…….”

김대성이 순사에게 말했다. 적당히 둘러대 시간을 벌었지만, 아지트를 정리하고 피신해야 했다.


이관술이 이재유와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 생활을 시작한 것은 3410월부터다. 331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된 이관술은, 343월 말 예심이 종결되면서 보석으로 출감했다. 출옥 4일 뒤, “서대문경찰서 탈주사건으로 경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서대문경찰서에서 수사를 받던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9월 중순, 동덕여고 교사시절 제자였던 박진홍이 이관술을 찾아왔다. “운동을 청산하지 않았다면, 10월 초순의 어느 날 오전 11시에 장충단 뒷산 약수터 부근에서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운동선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이관술은, 지정한 복장으로 약수터에 나갔다. 박진홍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뒤따르던 사내가 앞지른다. 사내가 살짝 얼굴을 돌리는데 두 눈이 마주쳤다. 이관술은 걸음을 늦추고 멀찌감치 사내를 뒤따랐다.


갖은 고심 끝에 고대하던이재유를 만난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활동을 시작했다. 이관술이 학생운동부문, 이관술의 연락으로 합류한 박영출이 노동운동부문, 이재유가 총괄을 맡았다.


3514, 이재유와 비밀연락통신을 하던 이인행이 검거되었다. 110, 동지 획득을 나간 박진홍이 예정시간이 지나도록 신당동 아지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재유는 증거가 될 만한 문서들을 폐기하고 하왕십리 박영출의 아지트로 옮겼다. 11일 신당동 아지트를 확인하러간 박영출이 잠복 중이던 일경에게 체포됐다. 11일 밤 이종희가 잠적에 들어갔다. 12일 새벽, 본정 4정목 성가병원에 입원해 있던 유순희를 빼내왔다. 인력거를 여섯 차례 갈아타고 하왕십리로 온 유순희는 이정숙과 함남 홍원으로 떠났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오전 8시경 하왕십리 아지트를 나왔다. 상인으로 변장한 이관술은 달걀상자를 등에 지고, 농부로 변장한 이재유는 가래 등 농기구를 들었다. 뚝섬 군자리 중랑천 제방에 문건과 팸플릿 등을 묻고 경성을 벗어났다. 한겨울에 농기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경성을 벗어나면서 알았다. 이재유는 농기구를 버렸다.


하얀 눈이 끝없이 내렸다. 날은 저물고 산길은 끊어졌다. 바람은 살을 에고, 내린 눈은 허리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이재유가 눈구덩이를 만들었다. 눈구덩이에 들어간 이재유와 이관술은 옷을 홀라당 벗어 바닥에 깔고 누웠다.

잠들면 죽음이오.”

이재유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서로의 몸을 비볐다. 눈구덩이 위로 하얀 눈이 끝없이 내렸다.


두 달 동안 양주, 포천 일대를 떠돌던 이관술과 이재유가, 수해를 입고 고향을 떠나온 이재민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가장, 공덕리에 정착한 것은 353월이다. 임야 6천 평을 빌려 개간하고 초가집과 돼지우리, 닭장, 창고를 지었다. 다음 해에는 임야 4천 평을 더 빌렸다.


이재유는 적기3호 작업을 서둘렀다. 그동안 준비된 원고만으로 인쇄를 했다. 아지트를 정리하면, 기관지를 발간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시일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국내 근거지에서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기관지를 발간하고 배포해야 한다. 망명지에서 만들어 국내에 반입되고 지역까지 배포되는데 두세 달이 넘게 걸리는 기관지는, 우리 운동의 생명과도 같은 현장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이재유의 믿음이었다. 저항은 폭압이 집중되는 곳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이 온갖 위험 속에서도 경성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돌이켜 보면, 체포와 구금과 도피와 도주와 탈출과 탈주로 점철된 지난날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19288, 이재유는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에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서의 노동운동 시절, 이재유는 70여 차례나 체포되며 비타협적 투쟁을 벌였다. 이재유는 감옥에서 만난 김삼룡, 이현상과 출옥 후 투쟁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19321221일 이재유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 감옥에서 혁명가로서 후세에 미명을 남기겠다고 확신한 이재유는 출옥과 동시에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노동운동부문에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학생운동부문에 최소복, 총괄에 이재유 등 5인으로 상부 트로이카가 형성된 것은 339월이다. 트로이카는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이재유그룹이 취했던 조직과 지도가 없는 협의방식의 운동이다.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투쟁을 통하여 운동자를 얻고 조직을 결성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활동했다.


335월 동덕여고 동맹휴학, 6월 중앙기독교청년학교 동맹휴학, 7월 숙명여고 동맹휴학 기도, 11월 중앙고보 동맹휴학, 12월 배재고보와 경성여상 동맹휴학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3361일 경성 편창제사 파업, 817일 별표고무 파업, 822일 소화제사 파업, 8월 하순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 파업, 97일 조선견직 파업, 919일 서울고무 파업, 921일 종연방적 및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파업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일경은 배후에 선동하는 무슨 계통이 있지 아니한가 조사했다. 서울고무 파업으로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권오상 등이 검거되었다. 종연방적 파업으로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등이 검거되었다.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파업으로 안삼원 등이 검거되었다. 12월 중순 이현상이 체포됐다. 배재고보 동맹휴학으로 변우식 등 수 명이 검거됐다.


34118일 이재유는 익선동 이순금의 집에 들렀다. 잠복해있던 일경이 이재유를 연행하려 했다. 시골서 올라온 친척이라고 둘러댄 이재유는, 용변이 급하니 잠시 후 가자고 하고, 화장실 천장 창문을 깨 가까스로 도주했다. 120일 밤 10시경 일경은 내수동 아지트를 덮쳐 이순금을 체포했다. 이재유는 간발의 차이로 중림동 안병춘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22일 오전 김삼룡과 안병춘이 체포되고, 이재유는 오후 3시경 중림동 전차정거장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경성에서 200여 명, 강원도에서 160여 명이 체포되었다.


343월 중순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담당 순사가 졸고 있었다. 서대문경찰서 2층 고등계 분실을 빠져나온 이재유는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담을 넘었다. 광화문쪽으로 뛰었다. 정동 입구에 이르니 경관들이 추적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마침 장작수레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수레를 밀며 언덕을 오르다가 건물 담을 넘었다. 기진맥진한 이재유는 혼절했다. 담을 넘은 건물은 미국 영사관이었다. 이재유는, 담을 넘은 도둑이 기절해있다는 영사관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경에게 인계되었다.


이재유에게 쇳덩어리가 달린 족쇄가 채워졌다. 허리에는 방울을 달았다. 이재유는 밥알을 짓이겨 모형을 뜨고, 우유곽 양철뚜껑을 갈아 열쇠를 만들었다. 겉옷 안감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다. 413일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 2층 훈시실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질환자 김찬규에게, 자신의 저녁밥을 주었다. 그날 밤 12시경부터 김찬규는 순사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새벽 4시경 견디다 못한 순사가 김찬규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 허리에 달린 방울을 떼고 족쇄를 딴 이재유는 옷보퉁이를 넣어 이불을 볼록하게 만들었다. 겉옷을 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훈시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정문으로 나왔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경비를 서던 순사는 이재유를 형사로 오인하고 경례를 했다.

수고하게.”

이재유가 유창한 일어로 말했다.


서대문경찰서 앞 자동차회사에서 택시를 탄 이재유는 황금정 2정목에서 내렸다. 겉옷 깃 속에 넣어 꿰매놓았던 지폐를 꺼내 요금을 냈다. 택시가 차고로 바로 돌아가지 않도록 웃돈을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3정목까지 걸어가 다시 택시를 탄 이재유는 동소문에서 내렸다. 산을 넘어 동숭동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관사 담을 넘은 이재유는, 정원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미야케 교수는 이재유가 검거되기 전, 경성제대 학생 정태식의 연락으로 만나, 제휴를 도모하던 사회주의자였다. 미야케 교수의 서재 탁자 밑 다다미를 들어내고 토굴을 팠다. 그날 이후 38일 동안 토굴에 은신했다.


미야케 교수는, 프로핀테른 극동지부에서 파견된 권영태가 주도하는 경성공산주의자그룹과 제휴 활동했다. “메이데이격문 살포사건으로 517일 정태식, 19일 권영태, 21일 미야케가 검거됐다. 이재유는 토굴을 나와, 준비해 두었던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관사를 떠났다.



* 이 글의 전문은 자율평론59호에 실렸습니다.

http://daziwon.com/?page_id=474&uid=3444&mod=document&page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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