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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노웹진

[유균의 철도이야기] 제주도에도 철길 있었네

  • 작성자철도노조
  • 등록일2017.04.19
  • 조회수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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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첫 번째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 중 “김녕에서 한림까지 철로를 깔고 사람과 화물을 운송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라는 문장에 끌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먼저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찾아보거나 물어보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제주시청 공보과에 전화해서 그 표석의 내용에 관해서 확인하니 공보과 역시 자료가 없어 모른다고 하며, 대신 당시 표석의 글을 쓴 김봉오 씨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봉오(김만덕박물관 관장)씨에게 전화로 사실 확인을 하니 오래전에 김석종 씨라는 분이 그렇게 말을 해서 기록했다고 하며 그분이 쓴 <포구의 악동들>이란 책에 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김석종 씨가 돌아가셔서 책 내용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며 표석의 내용도 고증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기차 ‘도록고’

도록고(トロッコ, truck)는 ‘손으로 미는 조그만 궤도(軌道)화차. 광차(鑛車)’라는 트럭의 일본식 표기이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광차(鑛車)나 관광지를 운행하는 열차를 부를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럭을 ‘도라꾸’라고 발음하여 사용했습니다.

때문에 기차를 제주도 사투리로 ‘도록고’로 불렀다고 생각하시면 맞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역(驛)을 ‘도록고집’, 철길은 ‘도록고길’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도록고를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철길을 이용하여 사람이 밀어 화물과 여객을 운송했던 작은 차량’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당시 신문에는 ‘도루코, 도로코, 토로고, 도록고 등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기사자료

당시 신문기사

일제 강점기 때는 한국의 자원을 더욱 쉽게 수탈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철도를 보급시키는 것이 시급했으며, 이에 따라 1920년 6월 ‘조선사설철도령’이 제정되어 한국에도 본격적인 ‘사철(민간철도)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 맥을 같이해 제주도에도 철길이 깔리게 됩니다.

당시 회사 이름을 따 ‘제주도 순환궤도(주)’라고 불렀으며 이름에 걸맞게 제주도를 순환하는 철길(총길이 193.1km)을 건설할 예정이었습니다. 그중 일부 구간인 협제-김녕(55.5km)이 먼저 1929년 개통돼 영업을 했습니다.

1927년 5월 일본인 야마모토(山本政敏)가 철길 부설을 신청하고, 1928년 11월 공사를 시작해 1929년 9월, 10개월 만에 완공했습니다. 당시 건설 비용이 75만원 들었다고 합니다. 그해 9월 6일부터 가영업을 시작했고 10월에 본격적인 영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도록고’는 안전하지 못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 영업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31년 9월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건설된 철길은 단선이었으며 자갈은 없었던 듯합니다. 궤간은 610mm의 협궤였고,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화물과 여객을 운송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제주시(성내)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요즘의 ‘도로’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비포장 소로(小路)였으며 그 옆, 안쪽으로 ‘신작로’라고 새로 도록고 길을 깔았습니다.

스캔

‘도록고’가 깔린 위치는 성내(제주시) 관덕정을 기점으로 동쪽은 구좌읍 김녕초등학교 맞은 편까지(학원사(문방구)가 ‘도록고집’인 것을 확인)였으며, 서쪽은 협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지도에는 표시돼 있지만 협제에서는 ‘도록고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좌읍 도록고집

구좌읍 도록고집

그리고 1931년 ‘도록고’가 영업을 정지하고 레일을 걷어내면서 기존의 소로(小路)와 합쳐졌으며 그 이후에 포장되고 두 번의 확장공사를 거쳐 현재의 일주도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도록고 길’은 아예 흔적이 없습니다.

1931년 이후 ‘도록고’의 영업은 중단되었지만 화물 운반용으로 몇 곳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림읍과 협제리의 중간지점인 ‘옹포리~한림항(1km정도)’에서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도록고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덕윤(84세 옹포리), 양만생(86세 한림) 어르신에 의하면, 옹포리에 제빙공장과 통조림 공장이 있었고, 한림 항에 배가 들어오면 그 배로 얼음을 운반하기 위해 도록고를 사용했습니다. 그 ‘도록고’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바닥판만 있었고(평장물차). 높이는 40-50전(cm)이고 네 귀퉁이에 한 발 정도의 말뚝을 세워 그 말뚝을 손잡이로 밀고 다녔습니다. 당시 10여개 이상이 있었으며, 주로 전라남도 노동자와 옹포리 주민이 인부가 되어 도록고를 밀었다고 합니다.

고덕윤 할아버지 그림

고덕윤 어르신이 설명하며 그린 그림

일이 없을 때는 도록고를 레일에 그냥 내버려뒀는데 마을 아이들이 장난삼아 타고 놀기도 했으며 학교에 갈 때 가끔 아저씨들을 만나면 태워줘서 도록고를 타고 가기도 했답니다. 도록고는 아이들도 밀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무겁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곳은 도록고가 15년 정도 존치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어르신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옹포리~한림항 구간 이외에는 도록고가 없었다”고 말씀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애월’에 갔습니다. 애월에 사시는 이순녀 할머니(88세, 애월)에 의하면 애월항을 쌓을 때 돌을 실어 나르기 위해 도록고를 사용했습니다. 그 ‘도록고’는 울타리가 조금 있었다고 하며 언덕을 올라갈 때 둘이 밀기도 했답니다. 일이 끝나고 당시 인부들은 목포로 갔으며 ‘도록고 길’은 폐쇄되고 그 후에 일주도로로 변했답니다.

임기추(85세 김녕) 어르신에 의하면, ‘김녕’에는 도록고가 2대 정도가 있었으며 “돌이나 짐은 운반하지 않았고 사람만 성내(제주시) 관덕정까지 운송했다”고 합니다. “평지에서는 밀고 언덕에 올라가면 차 위에 올라타고 내려갔으며 여름에는 빤스(속옷)만 입고 밀고 다녔으며, 속도가 매우 빨랐다(사람이 뛰는 정도)”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은 탈 엄두도 못 냈고, 고관들이나 탈 수 있었으며, 하루방(할아버지)들이 곱게 차려입고 담뱃대 물고 탔다”고 합니다. 또 사고에 대한 기억에 없다고 합니다.

이외 김진주(89세 조천) 어르신의 구술도 들었지만, 건강의 문제로 “어렸을 때 사람이 밀고 다닌 것을 본 적 있다”는 정도밖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구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봉오, 김진주, 이순녀, 임기추 어르신

故 김석종(1924년생)의 책(<포구의 악동들> 2008년 발행)에는

거기(동문교)에는 도로코가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우마차 외에 도로코밖에 없었다. 1928년경 동쪽으로는 김녕, 서쪽으로는 한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모양은 탄광에서 보는 것과 같다. 두 개의 차량이 있었는데 앞에는 사람이 타고 지붕이 있다. 뒤의 차량은 화물용으로 지붕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면 뒤 칸에도 사람이 탄다. 우리 가족은 겨우 뒤 칸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온다하니 너도 나도 구경 가자는 사람들이 도로코 역전으로 몰려온다. 도로코에 탄 우리들은 관덕정을 통과하고 서문을 거쳐 향교까지 기분 좋게 달렸다. 목적지는 “정드르” 지금의 구 제주대학 서쪽까지다. 그러나 서문 한천교까지 동산길이다보니 손님들 보고 전부 내리라 한다. 앞에서 조종하던 사람이 내려와 뒤에서 지정된 도로코 밀고 다니는 두 사람하고 동산 위까지 밀어 올린다. 달려들어 같이 미니 쉽게 동산 위까지 올라갔다. 모두 또 승차하여 달렸다.”는 ‘도록고’에 관한 당시의 풍경이 나옵니다. <‘포구의 악동들’에서 발췌> 

***

이 글은 1929-1931년까지 제주도의 ‘철도’에 관한 이야기로 84-88세 어르신 5분의 구술과 동아일보, 목포신보, <포구의 악동들>(故 김석종 저서), 그 밖에 일본서적을 참고로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도록고의 영업활동은 2년으로 그쳤지만, 해방 전까지 일본군이 진지나 항을 만들 때 흙이나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 계속 사용한 것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조금 더 많으신 분을 만났더라면 더 자세히 알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거의 돌아가셨고 설령 만났더라도 건강의 문제로 더 이상의 구술은 어려울 듯합니다. 때문에 제주도에도 철길이 존재했고 도록고가 운행했다는 사실 확인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당시 자동차는 1925-26년, 제주-모슬포는 서부차부, 제주-성산포는 동부차부, 모슬포-성산포는 남부차부가 담당하여 영업을 하였으며 차종은 포드(Ford)사의 4인승 및 8인승이었으며 후에 16인승→25인승, 1940년대 30인승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육상운수 통제정책에 의하여 1943년 제주자동차(주)가 되었으며 이 때 차량 수는 30여 대 내외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때는 유류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목탄으로 가기도 했습니다.<1969 제주연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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