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확인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 확인

철노웹진

광주에서 되새겨보는 해방세상의 꿈

  • 작성자철도노조
  • 등록일2017.05.15
  • 조회수250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발장소로 향했다.

광주오월의 이름. 전남대학교를 찾은 건 88년 당시 윤리선생님(당시 전교조 광주지부 창단멤버. 해직교사)을 향한 팬심 하나로 광고협(광주고등학교학생협의회)발대식 참석을 위해 찾은 후 거의 30년 만이었다.


 


나를 만든 탯자리,


순례의 시작은 전남대 방문과 박관현 열사비참배였다지금은 달라진 전남대 정문에서 5월 당시 산산이 흩뿌려진 꽃잎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조형물과 설명문을 보며 나는 어느새 열 살로 돌아갔다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 아우성, 그리고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의 총소리

 

초등학교 3학년. 계엄령이 선포된 후 등교하지 말라는 학교장의 가정통신문을 받아들고 봄방학이라 마냥 좋아했던 시절. 동네언니들을 따라 뒷동산에서 삘기와 봄나물을 뜯으러 돌아다니던 따스한 봄날. 평온한 며칠이 지나고 소리소문 없이 사람들이 끌려가 개죽임을 당했다는 풍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 내게도 들리던 그 때. 내가 직접 목격한 5.18 학살 사건의 최대치는 계엄군의 총알이 친구 민숙이의 팔꿈치를 스쳐 지나간 일이었다. 그날의 상처로 민숙이는 성장이 더디고 비가 오면 결근하는 학생이 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는 광주출신이지만 대학졸업때까지 5.18관련 행사(다큐동영상 상영, 사진전시회, 증언 및 강연 등)와 순례를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37년의 긴 세월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5.18묘지 방문기행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건 웬만큼 맘이 치유되어서일 것이다.



소중히 모아진 5.18자료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우리가 도착한 그날은 19805월의 현장이었던 광주가톨릭센터건물에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이 개관하는 날이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당시의 자료들을 소중하게 전시해놓고 있었다. 나는 5.18 기록사진들을 본 순간 시민군이 버스차창에 걸터앉아 각목으로 타악기 두드리듯 버스를 두들겨대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계엄군이 입고 있던 개구리 군복과 그들이 손에 쥔 장총에 붙어 봄볕에 빛나던 대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원찮은 등사기로 만든 선전물, 긴박감을 메모해 놓은 기자수첩, 광주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 지인들에게 흘겨 쓴 손 편지, 수습대책위의 회의자료.

소중한 자료들이 한곳에 모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기념관을 방문하는 이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손으로 흘겨 쓴 자료들이나 손상된 자료들을 정자체 인쇄물로 함께 전시해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월의 꽃잎은 핏빛 상처를 남긴 채 산산이 흩어지고




그 시절 따사롭다 못해 무덥던 5월의 한낮, 40대의 엄마는 두려운 눈빛으로 딸 셋을 겨울솜이불(당시 솜이불은 총알이 뚫지 못한다는 풍문을 믿었다)로 덮어둔 채 출근 후 돌아올 줄 모르는 아빠와 고등학생 큰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큰언니는 광주시내에 자리 잡고 있었고, 민중항쟁에 참여한 중앙여고에 재학 중이었다


광주로 다니던 완행열차 운행이 멈추고 계엄군이 재진입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어찌되었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우리 가족은 그 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누구도 5.18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평온을 가장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끔씩 학교에서는 5.18당시 사용하던 무기가 있는지 각 가정을 조사하곤 했지만, 당시 말단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갈까봐 두려워 무기조사 가정통신문조차 집으로 가져오길 주저했다.

 

내가 차린 상차림도 아닌데..?


 


우리 일행은 자리를 옮겨 화순으로 향했다. 오월투쟁이 점차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화순 탄광노동자들이 대량의 화약을 트럭에 가득 싣고 광주시민군의 민주화투쟁을 엄호하기 위해 진격을 준비한 곳이었다. 노동자, 학생, 시민 할 것 없는 그야말로 광주꼬뮨을 탄생시킬 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월기념비의 맞은편에 빨치산 진압 공덕비가 함께 놓인 것처럼, 그건 순전히 상상속의 역사일 뿐이었다. 계엄군이 시민군을 무참히 진압하며 광주를 장악하면서 투쟁의 확산은 중단되었다.

 

이후 우리 일행은 무등산편백자연휴양림에 숙소를 잡고 한낮에 폭풍처럼 밀어닥친 5월의 정신을 수습하느라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다음날 일행은 망월동 묘역을 참배한 후 담양 소쇄원과 식영정으로 향했다. 조선시대의 내노라하는 양반들이 꾸며놓은 정원이었다. 전날 광주민중항쟁을 추념하는 일정을 마쳐서인지 풍광 좋은 정각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모처럼 연휴를 맞은 관광객에 밀려 무엇을 차분히 정리해볼 여유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소쇄원과 식영정 방문을 마친 우리는 남도의 넉넉한 상차림이 한껏 돋보이는 남도특유의 한정식을 먹었다. 저렴하지만 한상가득 차려진 담양 떡갈비정식은 12일 바쁜 일정에도 여유를 주기에 충분했다. 100점 만점에 120.

남도의 딸인 내가 봐도 무한 감동의 상차림이었다. 푸짐한 인심과 끝없이 이어진 산해진미의 상차림으로 내 어깨까지 우쭐해졌다. 내가 차린 상차림도 아닌데 왜??


2년 전 개인적으로 참석한 역사기행 이후 노동조합 차원에서도 이런 역사기행을 했으면 했는데, 올해 때마침 청년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역사기행으로 5.18묘역과 담양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4월의 4.3 제주항쟁 유적지 방문에 이어 두 번째 역사기행이다. 좋은 일이다. 누군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현재를 살고 있는 매일 매일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역사일 텐데, 나 자신 오늘 하루도 좌절과 희망을 오가며 버티고 있는 현재가 최선을 다한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7년 5월 어느 날,  남도의 딸 윤혜영

                                                                                   



학살


김남주


오월 어느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12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12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12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12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직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12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12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윤혜영 서울차량지부


댓글1

    비밀글 의견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