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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노웹진

[아재들의 수다] 진검승부

  • 작성자철도노조
  • 등록일2017.12.04
  • 조회수187



운명의 날은 도둑처럼 왔다.

“1013일 집회에서 지부장들이 혈서를 쓰기로 했어요.”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박세증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혈서를 쓰는 동안 낭송될 시를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숨이 막혔다.

뭐라고 쓰는데?”

총파업승리!”

심장이 멈췄다.

 

3일 남았다. 어수선한 집회에서 여러 동지들이 혈서를 쓴다면 누가 그 시낭송을 듣겠는가. 집회 순서지에 시를 집어넣어야 한다. 이틀, 이틀에 써야 한다. 목욕재개하고 온 집안을 뒤져 만년필을 찾았다. 이를 악물었다.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철도에 입사해 첫 출근 하던 날이 떠올랐다. 역무실 입구에 역 현판이, 그 왼쪽 사무실 출입문 옆에 보안주재현판이 걸려 있었다. , 보안주재……! 나는 그게 보안대 파견분소인줄 알았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논설이 떠올랐다. 철도, 전력, 통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본의 손에 넘겨주면 안 된다……. 전략사업장인 철도에는 보안대가 상주하고 있구나! 철도 진입에 성공한 나는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

 

몇 년 뒤 새벽에 터진 사고가 떠올랐다. 새벽 두 시에 근무가 끝나 사무실에서 쉬고 있었다. 수송실 무전기로 “119! 119! 119!” 외침이 들려왔다. 현장으로 달렸다. 기관차와 화차가 사선으로 붙어 있었다. 기관차에 올라갔다. 얼마 전에 제대하고 복직한 수송 막내가 기관차 난간 아래 누워 있었다. 밀랍인형 같았다. 막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꼼짝도 않는다. 울면서 따귀를 때렸다. 꼼짝도 않는다.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흔들다 보니, 허리 아래가 없다. ! 나는 기관차에 주저앉았다.

 

역 광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추모시를 낭송했다. 다시는, 다시는, 원통하게 동료를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나는 썼다. 절규했다. 그 추모시 때문에 먼 곳으로 유배당했다. 막내의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그 사고 이후 한 동안, 사고가 나면 내게 연락이 왔다. 그때의 철도노조는 회사의 노무관리부서 같았다. 나는 현장 조사를 하고, 동료와 유족들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수집해 유족측 변호사에게 넘겼다.

 

나는 지금도, 동지의 임종을 어머니와 단 둘이 지킨 일을 잊지 못한다. 산소호흡기를 떼던 순간, 어머니의 가슴이 무너지던 소리……, 그 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49재 때 어머니가 술상을 차려주셨다. 어머니는 매일 밥상을 차려놓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그 편지들을 내게 주셨다. 가슴이 딱딱해져서 글을 쓸 수 없었다. 써야 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지부장들이 혈서를 쓰는 장면을 떠올렸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단상에 오른다. 두 다리가 흔들린다. 뒤따르던 동지가 손을 잡는다. 무릎을 꿇는다. 면도날에 햇빛이 부서진다. 피가 튄다. 성북열차 이혜숙 지부장이 대오에서 일어선다. 흐느낌으로 대오가 출렁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글을 쓸 수 없었다. 써야 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해고된 동지들이 떠올랐다. 감옥에 갇힌 동지들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 삐라를 만들어 우편으로 부쳤다.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떠올랐다. 동지들의 못다 이룬 꿈들이 꾹꾹 머리통을 짓눌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주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총파업승리! 다섯 글자를 써봤다. 써진다. 총파업승리! 다시 써봤다. 써진다. 한 획, 한 획을, 아주 천천히, 나와, 동지와,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과 분노를 실어 쓰기 시작했다.

 

하얀 광목 위에/ 나는 쓴다/ 빠앙!/ 기적을 울리며 달려온 세월/ 두 눈 비비고 저 멀리/ 아이를 업은 아내와/ 아내의 등에 업힌 아이를 위해/ 나는 쓴다/ 끼익, 끼이익!/ , 혀를 물고 철길에 쓰러지던 동료들/ 동료들의 빈소를 지키던 아주머니/ 허공을 쳐다보던 아이들의 텅 빈 눈망울 위에 나는 쓴다

 

이틀 밤을 꼬박 샜다. 이 시를 쓰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철도노동자는 파업투쟁 중이다. 총파업승리를 염원하는 시를 쓸 수 있는 영광이 지금 내게 주어졌다. 써야 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나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쓰고, 찢어버리고, 쓰고, 찢어버리고, 또 썼다. 쓰다가 까무러치면 깨어나 다시 썼다. 눈을 뜨니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만년필 뚜껑이 열려있다. 내가 쓴 시를 읽었다.

 

한 대의 기관차를 움직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동지들의 숭고한 노동/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들의 꿈과 긍지를 위해/ 나는 쓴다/ 하얀 광목 위에/ 뚝 뚝 떨어지는 피눈물로 쓴다/ 아내와 아이들과 남편과 어머니의 얼굴 위에/ 그 해맑은 미소 위에 눈망울 위에/ 총파업승리!/ 물러설 수 없는 우리들의 염원/ 총파업승리라고 쓴다

 

, 썼다! 기어이, 마침내, 내가 썼다. , 하느님, 제가 썼습니다! 원고에 눈물이 떨어져 잉크가 핏물처럼 번져나갔다. 혈서를 쓰기 하루 전이다. 시를 집회 순서지에 집어넣어야 한다. 시낭송은 비수같이 날이 서고 묵직한 저음이 되는 여성 동지를 수배해야 한다. 박세증 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썼다…….”

나는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 ! 그 혈서, 취소됐는데……, 내가 전화 안 했나?”

, 뭐라구! , 개자식아, 뭐라구!”

나는 무너져 내렸다. 도둑처럼 온 줄 알았던 운명의 날은,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뽑았던 칼을 아주 천천히, 칼집에 집어넣었다.

 


김명환  청량리역지부


* 나는 쓴다20161019일 대학로에서 열린 철도노동자 총파업승리 결의대회에서 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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